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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고려 멸망 왕씨 왕족의 최후 역사

by MooTi 2022. 4. 26.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고려 왕족의 역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과 고려 왕실의 왕씨들의 최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수많은 왕씨가 수장되었던 역사와 왕씨 척살이 멈추게 되는 역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낡은 귀족 사회를 개척하여 실력 중심의 성리학을 기본 틀로 삼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멸망한 고려의 왕씨 왕족에 대한 조선 왕조의 처우는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 고려 멸망의 역사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고려의 34대 왕인 공양왕이 마지막 고려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공양왕은 정몽주와 함께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에 반격을 준비했으나 정몽주의 죽음으로 무산됩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에 위치하였으나 경기 고양시로 이장되었습니다. 이 왕릉도 어떤 사람들은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이 진짜라고 믿기도 합니다. 조선 건국으로 꼭두각시 왕이었던 공양왕은 이성계와 동맹을 맺는 교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공양왕의 조서는 이성계에게 왕인 자신을 폐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족쇄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민왕의 후궁으로 고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비 안씨는 조선 공신들의 압박에 공양왕 폐위 조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은 공식적으로 퇴위를 선언하게 됩니다. 공양왕 폐위 조서를 작성한 정비 안씨는 노후를 보장받게 되었으나 본인이 고려를 멸망시켰다는 죄책감으로 술에 중독되어 여생을 보내다 세종대왕 재위 10년 사망합니다.

 

공양왕은 퇴위 선언과 함께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철퇴를 맞아 세상을 하직한 정몽주를 따르던 56명의 고려 공신들은 정도전에 의해 유배당하게 됩니다. 급진파와 가장 심한 대립을 하던 정몽주의 최측근 8명은 이때 이성계의 허락없이 정도전의 지시에 의해 곤장 100대 형에 처해져 세상을 하직합니다.

 

이성계는 이 사실을 묵인하는데 정도전의 행동은 이성계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한 것으로 그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정도전에게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고려 왕씨 왕족들은 태조 이성계의 보위 이틀 후 정도전의 명령으로 강화도와 거제도로 유배 당하게 됩니다. 이성계 보위 이듬해인 1393년 이성계는 공양왕의 동생을 불러 자신은 고려 왕족인 왕씨들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다며, 유배 보낸 왕씨들을 다시 육지에 살게 선처합니다.

 

정도전은 고려 왕족을 뿌리 뽑으려 하는데 왕은 선처를 베푸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경남 땅에서 김가행, 박중질 등이 왕화, 왕거와 접촉하여 고려 왕실 복원을 꾀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사실은 전국적으로 왕씨와 타인의 접촉을 경계하던 정도전에게 포착됩니다.

 

김가행, 박중질, 왕화, 왕거 4인은 포박되어 수원으로 압송 후 국문 도중 참수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형조, 사헌부, 사간원을 필두로 한 조선 공신들이 공양군의 사형과 고려 왕실의 왕씨들에 대한 처벌을 상소하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는 공신들의 요청을 이목 때문에 쉽게 허락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이 일을 정도전이 나서 해결한 것입니다. 1인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을 2인자인 정도전이 감행한 것인데 원래 2인자는 1인자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 고려 공양왕과 왕씨 일족의 최후

 

공양왕을 포함한 고려 왕실의 왕씨들은 결국 강화도와 거제도,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유배당하게 됩니다. 공양군(공양왕)은 삼척으로 유배되게 됩니다. 이때 공양군 후송을 맡은 중추원 부사 정남진의 손에 공양군과 아들들은 삼척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 고려 왕씨 일족들은 후송 임무를 맡았던 형조전서 윤방경에게 수장당하게 됩니다. 지금의 김포에서 강화도로 넘어가기 직전의 바다인 강화나루가 고려 왕씨 일족의 수장터입니다. 거제도로 유배를 가던 고려 왕씨들도 후송을 맡은 손흥중에게 수장당하게 됩니다.

 

강화도와 거제도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고려 왕족인 왕씨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 왕씨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인원이 상당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왕씨들이 바닷가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로 그 수는 상당할 것입니다.

 

 

 

◐ 고려 왕씨 숙청의 역사

 

1394년 4월 20일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는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해 바다 수장형만이 아니라 왕씨를 색출하여 절차없이 교살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왕씨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씨들은 성을 점을 하나 추가해 옥씨로 바꾸거나 아예 밭전자로 바꾸어 전씨로 바꾸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의 옥씨와 전씨는 왕씨 중 왕씨에서 성을 바꾼 조상들도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에서 500년 역사를 가진 전주 이씨는 많은데 비해 동일하게 500년 역사를 가진 고려 왕씨는 별로 없다는 점에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왕씨 숙청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독 대한민국에서 개성 왕씨가 별로 없는 것은 조선왕조의 숙청이 이유라 하겠습니다.

 

왕씨 숙청은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지 13년이 되던 해인 1413년에 태종 이방원이 중단하게 됩니다. 이방원의 숙청 중지 교서가 있기 전까지 조선왕조 건국 후 20년간 고려 왕실의 왕씨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고려 왕실의 왕씨들은 조선의 5대왕 문종 시절 고려 왕실의 제사를 허용해 주기 시작하며, 다시금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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